제 목   예천의유래
이 름   deerville  작 성 일 2009-01-06 04:40:30
예천의유래

우리 군은 소백준령(小白峻嶺)의 높은 줄기가 감싸고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은근과 끈기가 스며있는 『충효의 고장』이다.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하여 동쪽은 안동시, 서쪽은 문경시, 남쪽은 상주시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行政區域)은 1읍(邑),11면(面),265리(里), 면적은 660㎢, 인구는 6만 명이다.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에는 호로국(戶路國) 혹은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이라 군지(郡誌)에 전해지나 확인할 수 없으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신라(新羅)의 수주현(水酒縣),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醴泉郡)으로 처음 불리어지고, 안인현(安仁縣, 現 山北面), 가유현(嘉猷縣, 現 山陽面), 은산현(殷山縣, 現 上,下里面), 영안현(永安縣, 現 豊山邑)을 편입하였다. 고려(高麗)시대에는 936년(태조 18) 보주(甫州), 983년(성종 2) 양양(襄陽), 995년(성종 14)년엔 청하(淸河)라는 별호도 가졌으며, 1018년(현종 9) 5도 양계로 행정구역 개편시 보주는 안동영지사부에 용궁군(龍宮郡)은 상주목에 속하였다. 1274년(원종 15) 상주의 다인현(多仁縣)이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朝鮮)시대 1413년(태종 13) 보천군(甫川郡), 용궁현(龍宮縣)으로 부르다가 1416년(태종 16)에 보천군이 다시 예천군(醴泉郡)이 되었다.

1895년 용궁현(龍宮縣)이 용궁군(龍宮郡)으로 승격되고, 1896년 예천군과 용궁군이 경상북도에 속했다. 1906년 동로,화장면이 문경군에, 옛 다인현인 현내(縣內),현동(縣東),현남(縣南),현서면(縣西面)이 비안군(比安郡)에 편입되었으며, 안동군에서 감천면이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이 예천군에 통합되고 현서면이 예천군에 편입되어 풍양면 일부가 되었다. 1923년 풍기군(豊基郡)에서 상리,하리면이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1937년 7월 1일 예천면(醴泉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 1,200여 년의 긴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유구(悠久)한 역사에 걸맞게 고인돌, 선돌 등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과 국가지정문화재 26점, 도(道)지정문화재 54점 등 소중한 많은 문화유산이 아름다운 자연자원과 어울려 있다.

또한 해마다 10월 중에 개최되는 예천군민제전(醴泉郡民祭典)은 민속놀이, 백일장, 문화강좌, 국궁대회를 비롯한 문화제행사(文化祭行事), 예천군민의 날(10. 16)행사, 군민체육대회 등이 열린다. 통명농요, 공처농요, 청단(靑丹)놀음, 재애밟기, 도해따기, 마당굿, 별신굿 등 다양한 민속예술(民俗藝術)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천(醴泉)이라는 유래는 단술「예(醴)」자(字), 샘「천(泉)」字로 삼국시대 수주(水酒)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물맛이 좋고 단술과 같다 하여 「예천(醴泉)」이 되었으며,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밀접한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예천읍 노하리에 있다.



예천군청의 소재지로서 1914년 이전까지는 읍내사부(邑內四部)라 하여 동,서,남,북의 4개 읍내면(邑內面)으로 나누었는데, 군청이 북쪽이 되므로 북읍내면(北邑內面)이라 하여 노상(路上), 노하(路下), 백전(栢田), 용산(龍山), 효동(曉洞), 나평(羅坪), 생천(生川), 정산(鼎山), 구산(九山)의 9개 동을 관할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동읍내면의 갈두(葛頭), 응동(鷹洞), 광천(廣川), 우계(愚溪), 본동(本洞), 원동(院洞), 통명(通明)의 7개 동 전역과 남읍내면(南邑內面)의 본동(本洞), 청복(淸福), 왕상(旺相), 신기(新基)의 4개 동과 서읍내면(西邑內面)의 대무(大母), 흘증(屹增), 홍심(洪心), 지내(池內), 석정(石井)의 5개 동과 승도면(繩刀面)의 본동, 고평동 일부, 개포면의 상리 일부와 신당면(神堂面)의 하리(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예천면(醴泉面)이라 해서 노상, 노하, 백전, 용산, 생천, 갈구, 우계, 동본, 통명, 남본, 청복, 왕신, 서본,대심, 지내, 석정의 16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다. 1937년 7월 1일에 예천읍(醴泉邑)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제6542호)에 의하여 개포면의 상동을, 1983년 보문면 고평동을 편입시켜 18개 동이 되었으며, 1988년 5월 11일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동쪽은 보문면, 남쪽은 호명면과 개포면, 서쪽은 유천면과 용문면, 북쪽은 용문면과 감천면에 경계를 두고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주천, 예천향교, 동본리삼층석탑,석조여래입상, 개심사지오층석탑, 정충사, 흑응산성, 남산, 통명농요, 양궁경기장이 있고, 특산물은 옹골진미, 풋고추, 쪽파, 단무지, 동충화초, 누에가루, 영지버섯, 참우, 국궁(各弓) 등이 있다.



  • 위 치 : 예천읍 노하리 68
  • 옛날 우리 고을 담 밖 관혁동(貫革洞 - 지금의 예천읍 노상리)에 주천(酒泉)이란 샘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울산지방의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고을을 지나던 양호(楊鎬)라고 하는 명(明) 나라 장수가 이 샘의 물을 마셔 보고 감탄한 나머지 “과연 예천(醴泉 - 中國에도 있는 지명으로 단술처럼 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함)의 이름처럼 물맛이 좋다”고 하면서 “예천의 지명은 이 샘 때문에 얻게 되었구나“라 극찬하였다. 또 이 샘 때문에 통일신라 때 「예천(醴泉)」이라는 행정이름이 생겼다는 설(說)과 그렇지 않다는 설(說)이 엇갈리고 있으나, 참고 문헌이나 구전(口傳)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샘(속칭 군방골) 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군방골샘은 깊이가 8m나 되며 지하에서 용출(湧出)하는 자연수로 이름만큼이나 달고 차서 지역민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하는 감로수(甘露水)였고, 또한 한(恨)과 애환(哀歎)을 함께 한 현장이었다. 군방골이란 조선 중기까지 관아(官衙)와 활을 만들던 궁방(弓房)이 모여 있었으며, 일설에는 동헌(東軒)을 지키던 군방(軍房)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군방골샘 또는 궁방골샘이라 구전(口傳)되고 있다.

    근년에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상수도(上水道)가 보급됨에 따라 폐정(廢井)하였던 것을 이 우물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愛情)과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얽힌 유서(由緖) 깊은 샘이기에 1990년에 목조와가(木造瓦家) 사각(四角)지붕의 보호각을 세우고 샘(酒泉)을 복원(復元)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 위 치 : 예천읍 고평리 466(정충사)
  • (1) 불을 켜지 않은 밤에도 편지를 쓰는 시력(視力)

    약포(藥圃)대감의 약관 시절 겸암 선생(謙菴 柳雲龍)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아우인 서애 대감(西崖 柳成龍)은 약포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면서도 약포 선생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낌새를 알고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저녁 때 아우인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고평(예천읍)에 있는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 밤까지 돌아 오라 일렀다.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 하며 서애가 말하니 겸암은, ”약포는 밤중에라도 그 편지를 읽어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 하며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과연 새벽녘에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겸암은,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 하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서 줍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서애는 약포가 초인(超人)한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더하여 그 어려웠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같이 손을 잡고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고 한다.

  • (2) 도량(度量)이 넓은 시(詩)에 콧대 꺾인 맏동서

    약포(藥圃)가 젊었던 시절 그 맏동서 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약포의 체소함을 얕잡아 보는 눈치가 있는 것을 안 그들의 장인되는 십독 반충(習讀 潘沖 - 용궁면 덕계리)이라는 분은 본래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어 둘째 사위인 약포가 큰 그릇임을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맏사위에게 약포의 인물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자의 시(詩)를 지으라고 하였다. 맏사위가 먼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흰 용이 구슬을 물고 강을 건너온다.(白龍含珠渡江來) 흰 용은 솜으로 된 심지, 구슬은 불꽃, 강은 접시를 상징한다.”

    묵묵히 맏동서의 시를 들어다 보고 앉았던 약포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모든 나라의 성안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萬國城中揷漢幟) 모든나라 성안 ... 기름이 담겨진 접시 속 깃발 ... 심지에 불이 붙어 펄럭이는 모습”

    이윽히 아우동서가 지은 시를 들어다 보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겨진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한 개의 강(江)으로 밖에 못 보는데, 아우동서인 약포는 접시를 천하(天下)로 보는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그만 질려버려서 그 다음 부터는 아우동서인 약포를 마음속으로 존경(尊敬)하며 따랐다고 한다.

  • (3) 큰 인물임을 알아 맞춘 명(明) 나라의 관상사(觀相師)

    약포가 체약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천자(天子)를 만나러 궁중(宮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하게 보일까 염려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크게 하여 천자를 배알했다. 천자 옆에는 명나라 최고의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약포를 보고는 “조선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의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宰相) 감인데 아깝구나.” 하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약포는 그 다음 날 명(明) 나라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뒷굽을 다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더니, 어제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과연 조선에서 온 정탁(鄭琢)은 큰 인재임이 틀림없구나” 하더라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 (4) 꿈에서 얻은 용(龍)의 알

    약포(藥圃)가 태어나기는 용문면 하금곡리인데, 고평리에 새로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나 웬 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애를 쓰다가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 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물 속에 넣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 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며칠이 지나간 어느날, 용문면(龍門面) 금당실(金塘谷)에 볼일이 생겨서 살던 옛 집터에 들렸더니 뜻밖에도 얼마 전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다. 약포는 그 돌을 도포소매에 집어넣고 고평으로 돌아와서 꿈에 용이 시키던 대로 파던 우물에 집어넣으니 이게 웬 일이냐! 그 돌이 우물 밑에 떨어지자 말자 한방울의 물도 비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돌은 남아 있어 해마다 한 차례씩 우물을 가시어 내고 우물 속에 들어 있는 이 돌을 닦아서 고이 우물에 모셔 넣는다고 한다.

  • (5) 약포 대감의 체온(體溫)

    약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돌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주무셨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서애가 볼 일이 생겨 약포와 하룻밤 자게 되었다. 한겨울철 불기라곤 전혀 없는 냉방(冷房)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웠으니 춥기보다는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약포는 서애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얼마 후 서애가 누운 자리가 되 식을 무렵이 되면 약포는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번번히 약포가 누웠던 자리는 따뜻하였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 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 (6) 메기북

    메기가죽으로 만든 이 북은 크기가 지름 35cm, 둘레 119cm, 테의 나비 18cm이고, 무게가 2.3kg으로 가볍다. 이 북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 온다.

    300여 년 전 도정서원(道正書院) 벼랑아래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 위에 송아지를 자주 매어 놓고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송아지가 없어져 주위를 살펴보니 송아지의 꼴삐가 이 소(沼)에 내려가 있었다. 이 소에는 전부터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해와 이 이무기가 잡아먹은 것으로 생각하고 죽은 송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며칠후 큰 낚시를 만들어 이 소에 담구어 두었더니 큰 물고기가 물렸다고 생각되어 온 동네사람들이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고기를 건져 올려놓고 보니 어마어마한 큰 메기였다.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메기였으니 크기가 짐작이 갈 만하다. 이 메기를 잡아 놓고 보니 통쾌감도 느끼고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이왕에 잡은 고기를 살릴 수 없어 가죽을 벗겨 영원히 기념하고자 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북이 지금까지 보관돼 오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100년 전쯤 도정(道正)에 살 때 가족이 32명이 되어 식사시간이나 가족의 모임이 있을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따로 부르지 않고 이 북을 쳐서 모이게 하였다고 하니 북의 쓰임도 다양(多樣) 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보관해오면서 찢어지거나 흠 없이 원형 그대로 조상들이 물려준 물건을 지금까지 정성껏 잘 보존 관리하고 있다.

    정탁(鄭琢, 1526~1605)의 자(字)는 자정(子精), 호(號)는 약포(藥圃)이다. 조식(南溟 曺植),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經史), 지리(地理), 병서(兵書)에 밝고 믿음과 지조가 높아 50여 년간 벼슬길에 올랐으며, 5조판서(五曹判書)와 좌,우의정(左,右議政)을 지낸 명재상으로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名將)을 천거하여 나라를 구하게 하였으며, 특히 충무공(忠武公)을 사형 직전에 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한 뒤 명량대첩의 큰 공을 세우게 하였다. 사후(死後) 1613년(광해군 5) 위성공신(衛星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 되었다.

    이 곳과 연계하여 볼 수 있는 볼거리는 약포 선생의 유물(遺物)을 보존,전수하기 위하여 1980년에 건축한 정충사(靖忠祠)가 있다. 이 사당에는 약포영정(藥圃影幀 - 보물 제487호)이 있고 유물로는 약포유고 및 문서(藥圃遺稿,文書 - 보물제494호) 등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정충사 건너편 호명면 황지리(도정골)에는 도정서원(道正書院)과 약포사당(藥圃祠堂 - 문화재자료 제142호)이 울창한 산림(山林)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 내성천변(乃城川邊)은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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